퇴직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오랜 세월 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하고, 일터에서 물러나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인가?“

특히 3,40년을 일터에만 매달렸던 남성들에게 퇴직은 단순한 퇴직이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로 다가온다. ‘경제활동은 남자의 몫, 가사노동은 여자의 몫’이라는 전통적인 역할 구분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집안일은 여전히 ‘아내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시간이 많아져도, 그 시간은 ‘나를 위한 여가’이지, ‘가족을 위한 노동’으로 전환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가정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다. 아내 역시 더 이상 ‘집안일 담당자’가 아니다. MZ세대가 아니더라도 오롯이 아내에게만 가사노동을 맡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실제로 작년 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 남성들의 가사노동 분담 비중은 19%로 18개 주요 OECD 국가 중 16위, 1위인 스웨덴(44%)과는 무려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은퇴 이후의 삶이 무료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함께하는 의미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가사노동’이 새로운 해답이 될 수 있다.

가사노동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며, 추가 비용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생활비를 절약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가족과의 유대감을 회복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활동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가족 및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안일을 통해 “나는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설거지를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사노동이 일상 속의 지속적인 역할과 활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퇴직 후 가사노동, 이렇게 시작해보자

1. 분명한 역할 분담과 약속

처음부터 모든 가사노동을 맡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가사노동도 내 일이고 함께 하겠다’는 태도다. 어떤 일을 누가 맡을지 명확히 정하고, 그 약속을 존중하는 것이 시작이다. 예를 들어, 남편은 매일 저녁 설거지와 쓰레기 분리를 담당하고, 아내는 요리를 맡는 식이다. 이처럼 역할을 정하면 갈등의 여지도 줄어든다.

2. 맡은 일에는 간섭하지 않기, 책임 다하기

설거지를 맡기로 했다면, 어떻게 하든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깨끗하게 닦였는지, 그릇 정리 방법이 마음에 드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맡은 사람이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다. 간섭은 동기를 꺾고, 책임은 자율성을 높인다.

3. 결과를 평가하거나 탓하지 않기

가사노동은 정답이 있는 시험이 아니다.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결과에 대해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것은 갈등만 키울 뿐이다. 오히려 “고생했어”, “오늘도 수고했네”와 같은 말 한마디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동력이 된다.

가사노동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본 운영 시스템’이다. 그리고 퇴직한 남성들이 그 시스템에 제대로 참여할 때, 진정한 ‘함께 살아가는 삶’이 시작된다.

필자는 퇴직한 남성분들을 거의 매일 만난다. 교육받으러 오거나 상담받으러 오고, 잠깐 들르는 분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입을 모아 말한다. “삼식이는 되지 말자”, “가족에게 성가진 존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무슨 일이든 좋으니 가족에게, 사회에게 여전히 쓸모 있고 싶다는 것이다.

필자와 상담 중인 한 퇴직자는 출근시간은 피해 문밖으로 나선다고 한다. 괜히 이웃과 마주치는 게 눈치 보인다고 한다. 집에만 있기도 밖으로 나가기도 마땅하지 않은 모습이다. 이럴 때 요리를 배워보는 것 어떨까? 아내와 자녀를 위해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준비해 볼 수 있고, 조금 더 자신이 붙으면 지인이나 이웃에게 식사 대접을 할 수도 있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가족 안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의미 있는 노후, 존중받는 노후, 사랑받는 노후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앞치마를 두르고 걸레를 드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은퇴 후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고 가장 소중한 곳에 답이 있다.

바로 우리 집, 우리 가족, 그리고 내 두 손안에.

[윤형진 칼럼니스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울산동구 노동자지원센터 상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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