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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미래] 여행을 떠나고 싶다
기사입력 2020.06.20 0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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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내는 57세. 직업은 교사다. 평생 `칸트의 시계`에 따라 살아왔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기계처럼 정확히 수행한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다. 자잘한 사건에 호들갑 떨면서 자지러지는 세상에 문을 닫아건 채 묵묵히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들녘 펴냄)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일상이다.

똑같은 하루를 한없이 반복하는 이 남자는 현대인의 어떤 초상이다. 또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은 많으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하면서 대부분 도돌이표처럼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을 억누르고 `언젠가는…`이라는 달콤한 기대를 핥으면서 나날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 인생은 무엇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영혼의 떨림이 없는 이 상태를 우리는 불행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의 단단하고 적막한 일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눈앞에서 웬 여자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한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그녀를 구하는데, 이 우연이 그의 삶을 바꾼다. 여자는 수수께끼 같은 숫자를 이마에 적어준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는 수업 도중 학교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여자의 흔적을 쫓아 막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인생 경로를 바꾸는 데 엄청난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기회(chance)의 신은 우연의 신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 신을 포르투나(Fortun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풍요의 신이다. 누군가는 우연히 만난 이 신의 머리카락을 당겨 운명을 시험하고, 누군가는 상상의 혀를 내밀어 저 포도는 분명히 시다고 뇌까릴 뿐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노년에 접어든 그레고리우스는 이 나머지를 갈망하고 있었고, 기회가 일어서자 운명의 줄을 남김없이 당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생에는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 떠나는 여행만이 존재한다. 여행이 사라진 시대다. 한 남자의 우연한 출발을 떠올리면서 깊게 질문한다. `지금 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타 있는가.` 아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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