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은퇴를 준비해 오지 않았다. 대신 ‘역할의 전환’을 준비해 왔다.
국민은행 비서실(이사회 행정실)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필자의 고민은 여느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 직위는 무엇인지, 더 큰 책임을 맡을 수 있을지, 성과를 통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조직 안에서의 승진이 곧 인생의 전진이라 믿던 시기였다.
그러나 삼성의 전략 조직에서 의사결정의 현장을 경험하며 생각은 달라졌다. 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직장은 ‘자리’를 제공하지만, 인생에서의 ‘역할’은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삼성금융연구소 전략실에서 근무하며 그 인식은 더욱 분명해졌다. 의사결정은 냉정했고, 속도는 빨랐다. 전략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또 하나를 배웠다. 조직은 직함을 부여하지만, 인생은 그 직함을 평생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른다섯을 넘겨 시카고대학교 MBA 과정에 진학했을 때, 주변에서는 굳이 왜 다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충분히 안정적인 경력을 쌓았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러나 필자가 원했던 것은 직업의 연장이 아니라, ‘구조의 확장’이었다. 이 선택은 이후 기업 경영, 대학 교육, 공공 영역으로 이어지는 다층적인 경력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필자의 삶은 하나의 직선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 기업의 대표를 맡기도 했고, 다시 교육 현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필자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조직의 성과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이제는 개인의 성장 가능성과 생애 전환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생애설계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하나의 직업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은퇴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지금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역할이 바뀔 수 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직업과 역할을 바꾸는 과정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족의 생계, 경제적 불안, 주변의 시선은 늘 부담으로 작용했다. 직함을 내려놓는 순간,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분명해졌다. 직함이 사라진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새로운 역할은 삶의 폭을 확장시켜 주었다.
100세 시대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불안도 커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애설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불안의 시대이기보다 선택의 시대일 수 있다. 은퇴를 하나의 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역할이 전환되는 하나의 단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삶은 결코 계획된 직선이 아니었다. 돌아가기도 했고, 멈춰 서기도 했으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은 다음 역할을 준비하는 자산이 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각각의 선택은 다음 생애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이 글을 통해 거창한 노후 대비 전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이름 앞에 붙은 직함이 사라진다면, 어떤 역할로 기억되고 싶은가.
필자는 이제 은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늘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다음 역할을 조용히 준비할 뿐이다. 인생은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이 아니라, 역할을 바꾸며 확장되는 긴 생애 과정이기 때문이다.
[조훈 서정대학교 산학부총장/한국생애설계협회 이사/고등직업해외유치협의회 사무총장/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국제협력실장/전 삼성금융연구소 전략실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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