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가지 `느림`이 있다. 하나가 `나쁜 느림`이라면 다른 하나는 `좋은 느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예상하는 것처럼 나쁜 느림은 슬로 플레이의 그 느림이다. 나쁜 느림은 모든 골퍼에게 `공공의 적`으로 지탄받는다. 미국골프재단이 매년 미국골프지표를 조사할 때마다 `코스에서 가장 짜증나는 일`에 대한 답으로 `슬로 플레이`가 가장 많이 나온다. 옛 세계 1위 루크 도널드(잉글랜드)는 "슬로 플레이는 골프를 죽이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톱랭커 중에 슬로 플레이어가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일단 원조 골프황제 잭 니클라우스(미국)부터가 전성기 시절 느린 플레이로 도마에 자주 올랐던 선수다. 로베르토 데 비센소는 언젠가 "저녁 식사가 어땠느냐"는 질문에 "잭 니클라우스 같았다. 아주 좋았고, 아주 느렸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골프 전설 중 한 명인 벤 호건(미국)도 슬로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샘 스니드(미국)는 "호건의 퍼팅을 기다리는 동안 시가 한 대를 다 피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역 최고 스타 플레이어인 타이거 우즈(미국)와 필 미컬슨(미국)도 플레이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 현역 시절 닉 팔도(잉글랜드)도 슬로 플레이어로 유명했다. 그와 같은 조에 편성되는 날이면 대부분 골퍼가 좋은 성적 내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시니어투어의 골프 황제 베른하르트 랑거(독일) 역시 늑장 플레이로 지탄을 받는 선수다. 슬로 플레이로 붙은 그의 별명이 `미스터 해시계(Herr Sundial)`였다고 하니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하지만 골프에는 좋은 느림도 있다. 좋은 느림은 `조급하다`와 대척점에 있는 느림이다. 조급하지 않은 플레이, 조급하지 않은 스윙, 조급하지 않은 마음 등이다. 아니, 슬로 플레이만 아니라면 뭐든 느린 것이 좋다. 특히 스윙에서만큼은 느린 것이 절대 선이다. 빠른 스윙을 경계한 주옥 같은 선인의 말이 많다. 월터 심프슨은 "백스윙할 때 오른쪽 귀에 앉아 있는 파리라도 잡을 것처럼 (골프채를) 성급하게 휘둘러 올리지 말라"고 말했다. 구성 보비 존스는 "골프에 너무 느린 스윙이란 없다"고 강조했고 샘 스니드도 "힘 빼고 서서히 스윙을 하라. 볼은 결코 도망가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최근에는 느린 스윙의 골퍼들이 득세하는 경향이 짙다. 지난 시즌 PGA 신인왕 임성재야말로 `우보천리(牛步千里)`를 제대로 실천하는 선수다. 임성재는 지난해 누구보다 많은 대회에 출전했다. 소의 걸음으로 차곡차곡 쌓은 성적은 그야말로 천 리를 갔다. 특히 `거북이 백스윙`이 그의 치명적인 무기가 됐다. 4년 전쯤 임성재는 샷 난조로 아주 힘겨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임성재는 샷 난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스윙을 매우 느리게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의 백스윙을 보면 마치 슬로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이 거북이 백스윙 덕에 샷의 일관성이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한다. 임성재는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스윙의 일관성이 좋아지고 결과 역시 나쁘지 않다"며 "정말 내게 잘 맞는 스윙 같다"고 말했다.

스윙이 느린 대표적인 톱골퍼로 미국과 일본 여자골프를 평정한 88년 동갑내기 박인비와 이보미도 있다. 2008년 당시 최연소 US여자오픈 우승으로 `너무 빨랐던` 박인비는 이후 지독한 슬럼프를 거치면서 `느린 골퍼`의 대명사가 됐다. 박인비의 스윙을 보면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할 정도다.

`잘나가는` 동기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늦었던 이보미도 20대 후반 들어서야 꽃을 피운 대기만성형 골퍼였다. 이보미가 작은 키(160㎝)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대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골프장 특성에 맞춘 정확도 위주의 스윙 덕분이다. 일본 골프장은 디자인이 섬세해 거리에 신경 쓰기보다 정교한 골프를 해야 스코어가 잘 나온다. 이보미에게는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스윙 크기를 줄이고 임팩트에 집중하는 `슬로 스윙`이 필요했다. 이보미는 "내 스윙 템포가 느려 아마추어 골퍼들이 따라하기 쉬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옛 남자골프 세계 1위 조던 스피스(미국)나 옛 여자골퍼 세계 1위 리디아 고(뉴질랜드)의 스윙 역시 느린 편에 속한다.

느린 스윙은 솔직히 폼이 나지 않고 다이내믹해 보이지도 않는다. 특히 아마추어 골퍼가 느린 스윙을 하기 위해서는 꽤 용기가 필요하다. 스윙이 느리면 공도 제대로 맞히지 못할 것 같고 무엇보다 장타를 칠 수 없을 것이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윙이든, 플레이든, 마음이든, 느림의 미학을 배워야 할 때다. 전 세계 골프 시즌이 중단됐고 국내에서는 아직 대회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사회 분위기에 치이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 새해 첫 라운드를 하지 못한 주말골퍼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2020년 골프는 짙은 구름 속을 위태하게 뚫고 가는 비행기처럼 불안불안하다. 불안은 마음을 옥죄고 여유를 잃게 한다. 가공할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는 임성재의 느린 백스윙처럼 느림의 여유를 찾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오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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