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는 진즉에 다 빠졌다. 잇몸 곳곳에 임플란트를 박아 넣었다. 몰입하면 위아래 이(齒)를 악무는 습관 탓이었으나 사라진 이가 아까워 애석하다 여긴 적은 없었다.

"작품 하나 들어가면 짧아도 3개월, 길면 9개월인데 이가 안 좋아져도 책상을 그저 지켰습니다. 몰입의 흐름이 한 번 끊어지면 망설임이 많아지니까요. 이를 잃는 대신에 작품을 받았으니 저에게는 `남는 장사`였지요."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50대 후반 한 남성의 고백이다. 누구이기에, 어떤 `작품`이기에 몸을 내어주고도 돌아봄조차 꺾임조차 한 톨 없을까.

문화재청은 1일 고려시대 부흥했던 천년의 예술, 그러나 소수자만이 간신히 명맥을 잇던 불교 경전의 전문 예술인 `사경(寫經·경문을 모사함)`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하고, 동시에 제1호 대한민국 사경장(寫經匠)으로 1963년생 김경호 장인(57)을 인정 예고했다. 문화재청 발표 직후 40년간 사경의 외길을 걸어온 장인을 전화로 만났다.

"불교 집안이었고, 향교 책임자셨던 부친께 경전, 게송, 서예를 배우다 사경을 접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와 금니(金泥·아교에 갠 금박) 연구를 본격화했어요. 조계종과 당대 최고 명필 여초 김응현 선생(1927~2007·동방연서회장)이 1997년 공동 주최한 제1회 불교사경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사경의 책임감이 계시로 다가왔습니다. 사경을 전업으로 삼기로 다짐한 후 24년째입니다."

불교계 사경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불경 보급의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된 사경은 고려에 이르러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수백 명의 사경승(寫經僧)이 중국에 초청되기도 했다. 사경의 역수출이었다. 인쇄술 발달로 사경은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저물었는지도 모를 일이나 고승과 서예가에게서 가늘게 명맥을 잇는, 최상위 예술로 인정받아 왔다.

"고려의 사경 전문가는 중국으로 파견된 경이로운 수준이었습니다. 선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함은 그분들보다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나라에서 사경장 보유자로 인정해줌은 기쁜 일이나 책임감부터 느낍니다. 앞뒤 재거나 하는 일 없이 저는 오직 이것만 해왔는데, 나라에서도 알아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올해 중국 상하이에선 김경호 장인의 사경집이 출간될 예정이었다. 또 코네티컷 예일대, 맨해튼 컬럼비아대 초청 특강도 앞둔 상태였다. "코로나19로 중국도 뉴욕도 가볼 수 없으니 아마도 내년으로 미뤄질 것 같습니다. 사경의 세계화를 생각하면 주어진 이 모든 순간이 막중해져요. 사경을 중국에 역수출하신 고려 선조들과 얼굴 모를 사경승 표정이 어른거리기도 하고…."

백지, 자주색지, 고동색인 상지(橡紙), 군청색 감지(紺紙)에 그어지는 모든 획의 `잉크`는 대부분 순금 아니면 순은이다. 가장 많이 쓴다는 어두운 감지를 한 장 책상에 올리고 정금(精金) 같은 마음으로 불경을 쓰고 불화를 그리는 마음은 뭘까. 망가지는 몸도 잊고, 시간마저 허물어지는 저 순간.

"아주 말간 호수의 밑바닥을 봅니다. 온갖 상념이 지나가지만 물은 더렵혀지지 않는 모습이에요. 반경 1m 주변이 온통 환해지기도 하고요. 그런 마음으로 `사경 인생`을 살아왔네요."

어쩌면 아직 `장인`이란 수식어가 어색할 나이, 어렴풋이 예상 중인 후계는 없을까. 1녀 1남 두 자녀의 `뜻`을 묻자 장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첫째 딸아이와 둘째 아들 녀석도 기본적인 자질은 다 돼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로서 받아들이라 권할 순 없어요. 생활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평생을 지배했던 사경의 함의를 물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그 먼 옛날 이름 없던 사경승은 아니었을까. 사경을 이 시대에 부활시키기 위해서만 태어났으며, 그래서 여기까지 힘겹게 오게 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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